쓰다

수능 - ③ (마지막회)

호랭Horang 2005. 12. 4.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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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 20분

택시는 남수원 중학교를 향해 황급히 출발했다.
이미 출근시간 대에 접어든 거리에는 차들이 넘쳐나 길이 꽉 막혔다. 수능시험일에는 10시까지 출근이 아니던가... 여기 삼송전자같이 그런거 무시하는 회사들 엄청 많군. 쩝... 기사 아저씨가 오히려 나보다 더 다급해 보였다. 제발 늦지 말고 제 시간에만 도착하기를.

나는 아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남수원 중학교에 전화를 했다.
114에 전화를 하여 번호를 받고 남수원 중학교로 전화를 하니 여자 선생님 한 분이 전화를 받으셨다. 여차저차한 사정을 말씀드리고 수험표가 있는지 확인을 부탁드렸다. 선생님도 수험일 당일 아침이라 챙길 일이 많으신 듯 좀 귀찮 & 난감해 하시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도 끈질기게 기다렸다. 갔다가 수험표 또 없으면 그 땐 정말 방법이 없잖아... 그러다가 전화가 끊어졌는데, 다시 전화를 하니까 그 때 부터는 통 연결이 안된다.
아쒸...


07시 45분

어느 샌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택시는 골목 골목을 헤집고 나가 드디어 학교 앞에 도착했다. 수험생들과 학부모들, 그리고 응원나온 학생들로 학교 앞은 엄청나게 분주했다. 경찰 아저씨가 문 앞에서 교통 정리를 하고 있었고, 택시에서 빨리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아... 감사합니다."
"네... 근데... 오잉???"
"어머어머어머...!!!"
.
.
.
말도 안돼.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남수원 중학교가 아니라 "동"수원 중학교 였다.
아저씨가 순간적으로 착각을 하신 모양이었다.
Oh, shit! 이런 일이 어떻게 내게 있을 수 있어. 드라마에서나 보아오던 그런 얘기가~ ㅠ.ㅠ
완전 좌절이었다.

8시까지는 입실을 해야하고, 나는 수험표도 없으니 고사본부에 들르려면 더 빨리 가야되는데...
순간 포기에 가까운 마음이 살짜쿵 들었다.
'시험을 보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일까...???'
'그래.. 어차피 공부도 하나도 못했잖아. 괜히 시간만 낭비야.'
'오늘 시험본다는 사실을 집에서도 모르니 희원이 입만 잘 막으면야, 뭐 쪽팔릴 것도 없지.'

당황했던 기사 아저씨가 정신을 차리시고 경찰 아저씨한테 뭐라고 물어보신다.
"음... 아차아차~ 거기지. 어딘지 알겠다. 빨리 다시 갈께요."
아저씨는 미터기를 끄고 차를 돌리셨다. 그러나 이미 우리 눈앞의 도로는 아까보다 더욱 꽉 막혀 있었다.

길거리에 경찰 아저씨의 오토바이가 보인다.
"아저씨, 그냥 저 경찰 오토바이라도 타고 가는게 낫지 않을까요.."
"네.. 근데 어딘지 알거 같으니까요, 조금만 있어보세요."

어딘지 알겠다도 아니고, 어딘지 알거 같다니... (ㅡ,.ㅡ)

아마 자기 때문에 시험을 못 보는 한 수험생이 있다는 것에 대한 엄청난 가책과 부담이 아저씨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날라리 수험생이라는 것을 알면 저렇게까지는 안하실텐데.. 쩝

어쨌든 아저씨는 오토바이라도 타겠다는 나를 그냥 태우고는 큰 길로 나가셔서 옆 차선에 있는 다른 택시를 세우고는 기사 아저씨한테 남수원 중학교 위치를 확인하신다. 그러기를 두어번... 아저씨는 이제 감을 확실히 잡으신 듯 자신감 있게 비상등을 켜고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까지 하시며 수험장으로 돌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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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나는 8시에 남수원 중학교 앞에 도착하여 제 시간에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나를 내려주시면서 나보다 아저씨가 더욱 안도감을 느끼신 듯 했다.
자기 때문에 늦게 되어 미안하다며 택시 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진땀을 빼신 아저씨께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요금을 드려야 제가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했더니, 그제야 조금만 받겠다고 하신다.
(중간에 미터기를 끄신 바람에 얼마인지도 모름...)

그 짧은 아침 시간...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어린 학생들과 섞여서 하루 종일 시험을 보았다.

시험 결과를 떠나 그 날 아침 - 나는 나잇값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가 19살이었다면 그 날의 일에 대한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에는 그것이 나의 삶의 전부에 가깝다고 생각했을 일이었을테니까.

그러나 10년의 시간은 나에게
여유를 주었고, 대안을 주었고, 달리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주었고, 포기할 줄 아는 마음을 주었다.
지금 도저히 답이 안보이고 뾰족한 수가 없다고 생각되는 가슴 답답한 일들도
10년이라는 세월 뒤에서 보면 조급하지 않게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수능 뉴스를 보니 어려웠다는 말이 많던데,
창피해서 못올리고 지나갔던 작년의 일이 문득 생각나서 적어본다.
시험 결과?
...오늘도 야근은 계속 되어야 한다~~~ 주욱~~~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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