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경험되지 않는 것

호랭Horang 2004. 6. 1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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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년의 싸움은 힘겨웠고 정유년의 싸움은 다급했다. 모든 싸움에 대한 기억은 늘 막연하고 몽롱했다.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번째 싸움이었다. 지금 명량 싸움에 대한 기억도 꿈속처럼 흐릿하다. 닥쳐올 싸움은 지나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낯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

요즘 읽고 있는 김훈의 <칼의 노래> 중 일부이다. 무수한 싸움을 경험한 이순신이지만 그에게도 싸움은 항상 새로운 것이었으며, 경험되지 않은 첫번째였다. 비단 저 이야기가 싸움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회사일이지만 받아들이는 내가 달라지고 그때 그때 마다의 상황이 달라지니, 일을 시작할 때마다 그 일이 모두 첫번째 일이며 지나간 모든 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마다 그 사랑이 모두 첫번째 사랑이며, 지나간 모든 사랑과 전혀 다른 낯선 사랑일 것이다. 

어렸을 적에 나는 목석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뎌지고 싶었으며 그게 안될 경우 최소한 겉으로라도 무디게 보이길 원했다. 왠만한 일에는 끄떡도 안하고 싶었으며, 어떤 일이 나에게 생겨도 감정의 변화없이 무던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이것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모두 해당되는 일이었지만, 안좋고 슬픈 일의 경우는 더욱 더 그랬다. 아마 그 때는 그런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나의 내부에서 촉발된 의지가 아닌 외부에서의 자극에 의해 반응하게 되는 것은 나약함을 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 때 같이 흔들리는 갈대가 더 강하다는 동화를 읽으면서도 그 때 나는 그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주변을 새로운 것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감수성일 것이다. 작은 것에도 기뻐할 줄 알고, 행복해 할 줄 알고, 때로는 슬퍼할 줄도 알게 하는 것. 세상과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통로이며, 나의 삶에 다양한 표정을 만들 수 있는 것. 새로운 무언가가 나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두 팔 벌려 여유있게 환영할 줄 아는 것. 그리고 더욱 다양한 자극에 나를 노출시킴으로써 나를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단련시킬 수 있는 것. 

나는 반복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무엇인가가 반복된다는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물론 전혀 새로운 것을 매일 매일 개발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보다도 나에게 닥친 매 순간을 이벤트로 만들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친구들과 요즘 감수성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한다. 나이 스물 여덟, 왜 갑자기 감수성이 우리의 주제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굳이 목석같이 살고 싶지는 않다. 자극받고 싶다. 바람이 불면 그저 바람을 느껴보자. 전에 느꼈던 바람과는 방향도, 세기도 전혀 다른 새로운 바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나에게 모든 시작은 경험되지 않은 첫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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