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퇴근대첩 - People Skill

호랭Horang 2005. 6. 30.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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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대인관계가 귀찮아진다. 아는 사람들에게도 이럴진대,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정성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갑자기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퇴근 버스에서의 일이다. 희원이와 같이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좌석이 다 차있어서 나란히 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희원이가 맨 뒷좌석에 앉고 나는 그 앞에 앉았다. (희원이가 나보다 높은 위치에서 바로 나를 볼 수 있게 되어있는 상황)

아, 근데 내가 앉으려고 하는 자리에 작은 손가방이 하나 있다. 꽉찬 퇴근버스 안에서 개념없이 자기 가방에 한 자리를 떡하니 주고, 주인인 여자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다. 버스 안에서 혼자 앉아서 가면 편하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래도 사람 많은 통근버스에서 이러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어쨌든 나는 앉아야 하겠기에 나름대로는 정중하게 "가방 좀... 치워주시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여자, 기분 나쁘다는 듯 가재미눈을 해가지고 가방을 질질 끌어 가져간다. 참내, 똥뀐 놈이 성낸다고 사람이 옆에 앉는 것이 그렇게 싫으면 자가용을 갖고 다니던가 택시를 타고 다니던가 이게 웬 똥매너?

근데 이 때부터 이 여자 아주 웃기게 나온다.
눈을 감고 창밖을 보고 있다가 내가 조금만 부스럭거리면 한번씩 째려본다. (내가 오버하는 거 아님. 희원이 뒤에서 모두 목격) 휴대폰에서 버튼 누를 때 잠깐 소리가 났는데 이내 또 째려보고 눈을 감는다. 이러기를 대여섯번... 아주 어이없다.

어쭈... 너 지금... 해보자 이거냐...? 어휴~ 이걸 기냥 콱!

한 주먹 거리도 안되는 게 까부는 걸 보니, 성질 같아서는 확~ 하고 싶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일단 참았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의미에서 책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꺼내는데도 팔이 조금 닿았는지 째려본다. '그래.. 볼테면 봐라' 하고 일단은 기분나쁘지만 무시하고 책을 읽었다. 버스 안에서 책을 읽으니 약간 멀미도 나고 졸음이 오려고 했다. 오호~ 그런데, 이 여자 정신없이 자고 있다. 허허 이런... 전투 중에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나는 오던 졸음을 물리치고 정신을 차리고 기회를 노렸다. 이 여자가 내 좌석으로 깊이 넘어와 나한테 살짝 기대려는 순간! 약간 뒤로 제껴져 있던 내 의자를 확~ 원위치 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 격이라고나 할까. (버스에서 내리고 난 뒤 희원이는 나의 모션은 대범 그 자체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 의자는 그 여자의 뒷통수를 정확히 가격했고, 여자는 당황하며 잠을 깬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난 능청스럽게 책을 계속 읽었다. 책 읽다가 허리 아파서 내 의자를 세운 것인데 자기가 아무리 시비쟁이라고 한들 뭐라하겠는가... 그 여자는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발발 떨다가 내려버렸다.

핫핫핫!!! 유쾌! 상쾌! 통쾌! ^o^v
희원이는 보는 자기가 더 조마조마하고 무서웠다며 이 날의 퇴근대첩에서의 나의 대담한 전술을 이야기하곤 한다. 어쨌든 사소한 것에 목숨거는 나로서는 아주 흥미진진하고도 시원한 한 판이었다. 나한테 덤비면 주거~ 뭐 이런 것을 확인한.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얼마 전, 아침 출근(!) 버스에서 그 여자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인생은 시리즈다... ㅠ.ㅠ)
별로 주목하고 싶지 않았으나, 사람이 꽉 들어차는 출근버스에서 여전히 황금색 손가방을 옆자리에 두고 천연덕스럽게 창밖을 향해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나는 단숨에 알아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침 출근길부터 짜증나고 싶지 않았던데다가 다행히 맨 뒷자리에 빈자리가 있었기에 일단 그녀를 지나쳐 맨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내가 약간 높은 의자에 앉게 되어 그녀의 뒤통수가 보였다. 앉아서 잠시 생각했다. 쟤는 정말 정신 못차리는 애구나. 퇴근버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출근버스에서도 저런 만행을 저지르다니. 저렇게 개념없으신 분은 한 번 혼구멍이 나야 정신을 차릴텐데...

드디어 다른 좌석이 모두 다 차고 그 자리가 맨 마지막 공석이 되었다. 그 자리를 향해 젊은 여자분 하나가 다가왔다. 앉으려고 하다가 가방이 있는 것을 보고 멈칫 한다. 그런데 주인은 창밖을 보고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알아서 가방을 치워주지 않는다. 이 젊은 여자분 약 2초간 머뭇머뭇 한다. 그러다가 아마도 손으로 살짝 그 여자를 깨운 모양이다. 오호~ 내가 이번엔 좋은 구경을 하게 되겠군 하며 은근 기대하고 두 여자의 대면을 주목했다. 이 젊은 여자가 뭐라고 말을 건넸다. 가방 주인은 또 분명 싸가지 없이 가재미눈을 하고 싫은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방을 치우겠지. 그럼 저 젊은 여자가 어떻게 반응할까 너무나 궁금했다. 흥미진진~

그런데 그만!
그 순간! 그 젊은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뭐라고 즐거운 듯한 멘트를 날리면서 옆자리에 앉는 것이다!!! 내 자리에서는 가방 주인의 뒤통수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방 주인은 어떤 표정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젊은 여자의 표정은 도저히 기분 나쁜 순간엔 나올 수 없는 환한 미소였다. 이 장면은 나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내가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나름대로 긍정적이고 좋은 인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믿고 있던 나. 퇴근버스 안에서의 그 여자는 정말 구제불능인 특이 케이스라고 결론내고 전투의 승리감(?)에 취해있던 나. 그러나 그건 말도 안되는 착각이었던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사람을 대하면서 저런 표정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정말 나를 짜증나게 하는 상황에서 절반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 나와 만난 날, 그 가방주인이 특별히 신경이 더 날카로웠던 날이라고 아무리 내 편에 너그럽게 생각해준다고 하여도 결론에 있어서 이렇게 심한 차이가 있다면, 분명히 내가 그를 대하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 나의 마음을 먼저 곱게 하고 정성을 다하자...

라고 다짐하지만 어쨌든 나 건들면 주거~ 이런 생각은 여전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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