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이방인을 위한 변명 < 여행의 이유 >

호랭Horang 2020. 11. 30.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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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와서 살고 있는 그렇지만 완전한 이민자도 아닌 나같은 사람은, 언젠가 내가 발디디고 있는 이 곳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초(超)장기 여행자인 나에게는 이 책이 조금 색다르게 읽혔다. 팔 걷어붙이고 나에 대한 변명을 대신해 주는 사람을 만나서 반갑고 고마운 기분이랄까.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알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냥 현재를 즐기자. 현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 마주 앉아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미래는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하자고 생각했고... (p.109)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이방인으로 사는 동안에는,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돈을 구해야(나의 경우는 벌어야) 하고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해야 한다.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엉뚱한 일을 당할 수 있으니 항상 긴장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마냥 힘들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만은 아니다.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의 말처럼,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가벼운 그런 상태를 직접 느끼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오직 나를 나로 머물게 한다. 그래서 여행자인 나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온갖 복잡하고 골치아픈 일로부터 한 발 떨어져 자유로울 수 있다. 한편, 여기에서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관찰하고 기록하고 때로는 일시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떠나간다. 

맞다. 나도 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 초장기 여행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란 말이다. 그림자에 연연해야 하는 삶이 옳은 것이라고 누가 정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김영하, 문학동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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